김건예 작가는 2001년 독일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했다. 뒤셀도르프 아카데미를 졸업할 무렵 레히베르크하우젠(Rechberghausen)의 후원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바덴-뷰르텐베르크(Baden-Wuerttemberg) 주의 후원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작가는 “전시를 준비할 때마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전시의 콘셉트에 대해 고민한다. 이전과 조금 더 다르고 발전된 그림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매달 매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시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고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나 스스로도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나의 작업 방향은 내 삶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독일 시기의 작품은 대부분 인물의 개성과 움직임 포착에 집중하였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2009년 국내에서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현대인을 중심 테마로 작업하고 있다. 김건예 작업의 주된 주제인 ‘현대인’은 일상보다 사회적 관계망 내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심리적 욕구를 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회화 속 현대인은 집단화된 사회에서 소외된 개인에 주목한다. 삶의 무게와 깊이보다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현대인의 고독과 익명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얇고 평평한 화면에 마치 인쇄된 듯 그리는 작업의 평면적 이미지는 김건예의 시그니처, 그리드라는 기법으로 그의 회화가 가진 기법의 특수성이다. 도시의 에너지와 인간의 잠재된 욕망들 그리고 억압 등을 다루는 방식에서 배경을 단순화 시키고 인물의 표정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다. 또한 붓 끝이 지나가며 남겨놓은 가느다란 선들의 중첩과 화려하고 강한 색채는 현대인의 잠재된 환상을 보여준다.
최근 김건예의 그림에서 인물이 사라지고 풍경이 나타났다. 동적인 인물 중심에서 정적인 자연의 풍경이 화면에 등장하면서 이번 전시에는 쓸쓸한 감성을 보여준다. 2018년 “숲으로 들어가다”에서 보여준 숲 속 풍경은 관람자의 동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촛불을 손에 들고 가슴을 드러낸 채 서 있는 여성과 주변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바깥을 응시하는 사슴은 마치 신비로운 숲을 체험하는 것처럼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김건예는 이번 전시 주제인 ‘잃어버린 계절’에선 잔잔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강한 욕망과 화려한 색채를 배제하고 쓸쓸하지만 따뜻함을 품었다. 이러한 변화는 현재 우리에게 처해진 팬데믹(pandemic)에서 느낀 감성 표현이 아니었을까. 만남을 줄이면 즐거움도 줄어든다. 단절은 각 개체 사이를 텅 빈 공간으로 가두어 버리고 마치 안개 속을 걸어가는 듯 시간도 천천히 통과하는 것 같다. 1초가 아깝게 변화와 변화를 거듭하던 사회는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일시 정지 되었다. 기나긴 겨울과 봄 사이에서 자연은 제 시간을 맞추며 깨어나고 있으나 일상은 여전히 멈칫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무중력 상태와도 같은 일상에서 작가는 창 밖 풍경을 보면서 마음의 풍경을 그렸다.
김건예의 이번전시 ‘잃어버린 계절’은 자연풍경을 통해 은유적인 치유의 감성회화를 보여준다. 그의 풍경은 멀리 보이는 산과 들이 아니라 스틸컷 프레임에 포착된 사진처럼 마음으로 끌어당겨 놓았다. 이러한 기법으로 나무의 기둥은 그리드로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배경은 감성적인 무드로 채웠다.
기존 회화작품에서 인물을 중심으로 그리드 기법을 사용하였다면 이번에는 나무 기둥을 주체로 그리드 기법을 사용했다. 붓 끝을 이용해 가볍게 쓸어내리는 듯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이 기법은 이번 풍경작업에서는 화면의 분위기를 더 강조하기 위해 부분적으로만 사용했다. 겨울도 봄도 아닌 코로나의 계절은 모두를 낯설고 불안하고 두렵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김건예는 멜랑콜리한 분위기와 색채로 사회적 거리두기로 우울하고 지친 현대인을 위로한다.
코로나19는 사회적 동력을 둔화시키고 있다. 모든 것이 멈추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거처에서 수일 또는 수개월간 자가 격리를 경험하였다. 모든 전시와 공연은 취소되거나 연기되어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치명상을 입히고 있다. 비대면 전시와 공연은 인터넷 망에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작품과 직접 마주하며 느끼는 감동에 비해 반감될 수밖에 없다. 봄은 왔지만 아직 사회적 봄은 오지 않은 시간이다.
김건예의 이번 전시작품에 담겨있는 봄눈은 차디찬 겨울의 끝에서 곧 따뜻해지고 새싹이 돋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쓸쓸하지만 온화한 공기로 가득한 김건예의 감성풍경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그의 그림과의 대면으로 ‘잃어버린 계절’을 찾아서 감성을 치유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정명주/아트스페이스펄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