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7.15fri ~ 7.30sat
김미련 김승현 김윤경 김윤섭 서진은 손파 안유진
손파 : 많은 사물이 그것도 변하지 않고 인간과 함께한 자연, 그 자연이 나로선 신기할 뿐이다. 물, 흙, 공기, 나무, 돌 등등. 인간은 자연을 이용해 편리함을 도모하고 또 다른 물질을 결합한다. 자연물과 인공물, 그리고 ‘나’의 관계가 하나의 흥미꺼리다. 자연물에 대해 내가 아는 정도는 익히 사용하고 흔하게 보아왔던 그런 정도가 아닌 오감을 모두 동원한 집중된 관찰이 필요하다. 해체하고 분해하는 과정이, 또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나를 즐겁게 하고 빠져들게 만든다. 그 발견된 성질을 내가 조정해서 변화시킬 때 즐거움이 완성된다.
서진은 : 1923년 9월 <백조>에 발표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시에서 잠(꿈)은 곧 `부활`, 침실은 꿈과 부활의 동굴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침실이 부활의 동굴이 될 수 있는 것은 원초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와 관련을 맺는다고 볼 수 있다. 원초적인 완전성을 획득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나의 침실로>는 기도하고 있다. 물론 `꿈`은 `밤`을 시간적 배경으로, `침실`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잠`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낮 시간의 활동을 `삶`이라 한다면, 밤 시간의 잠은 일종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잠`은 영원한 죽음이 아닌, 아침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므로 밤은 `부활의 시간`이요, `침실`은 `부활의 동굴`이 되며 잠(꿈)은 곧 `부활`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즉 <나의 침실로>에서 침실은 정신적 안식과 활력을 주는 재생의 장소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김미련 : 내가 살고 있는 한국 대구의 호박넝쿨, 해바라기와 동료작가가 살고 있는 독일 뒤셀도르프의 베란다에서 재배된 호박넝쿨, 식물의 스캔 받은 이미지를 서로 중첩해서 디지털 프린트하였다. 나와 동료작가는 동일한 식물을 같은 시간대에 다른 공간에서 스캔해 인터넷을 통해 파일로 교환하였고, 이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의 정보가 제거된 상태로 이미지만 남아 부유하듯이 중첩되어 있다. 장소가 가진 시공간의 비가시적인 겹겹의 층들을, 나의 부재(不在)와 현존(現存)을 매개로 가늠하고 재해석 또는 규정하여, 긴장된 이미지로 가시화하는 작업이 요즘 나의 관심사이고 과제이다.
김승현 : 나는 창작자 이다. 창작자는 어떻게 대상을 유혹하거나 유혹당하는 가에 관해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작업도 시작된다. 어쩌면 대상을 설정하고 유혹도 같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내가 좋은 느낌을 받는 더 나아가서 감동을 받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내가 유혹 당한 이유를 찾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앞에서 머물렀던 작품은 어떤 것이었나. 개인적인 취향으로 평면이나 입체작업이나 표현이 많이 되지 않은 -나는 뭔가 원형질을 나타내는 작품 이라는 생각을 한다. – 작품을 좋아한다. 말로는 설명 할 수가 없다. 채우지 않았지만 채워지고, 크지 않지만 웅장한 그런 작품들. 나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지금 느끼는 이 떨림, 이건 도대체 뭔지. 작품에 담긴 작가정신, 제작된 시대의 시대정신, 기타 의미들 이전에 표면에서 공간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성을 자극하는 무언가. 내가 찾은 떨림의 이유, 그것은 ‘구성-composition’ 이다. 평면에서 보여지는 구성, 공간에서 보여지는 구성. 이것이 바로 내 발목을 잡고 그 앞을 떠나지 못하게 계속해서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 ‘유혹’ 이다. 이제 나를 유혹하는 기술 ‘구성’ 을 내 표현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그것이 내가 능숙하게 다룰 기술이 될 때까지.
김윤경 :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배타적인 종교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많은 작품들이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지만 나는 예술이 근본적으로 선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은 상품과 구분되는 신비로운 무엇이 될 수 있고 감상자들은 새로운 미적 경험을 겪기도 하며 비평은 또 하나의 예술 장르가 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인식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수천 수만 가지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고 나 또한 애초에 내가 묵주를 보았던 것과 같이 단 하나뿐인 기념비적인 나만의 묵주를 만들어 거리의 가로수마다 하나씩 걸어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난 작가 중 한 명은 자신이 그린 오렌지들 속에 태양의 기운이 가득 스며들어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와 얼마간 대화를 나눈 뒤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이것이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녀의 작품은 내게 그런 믿음을 보여 준 미적 경험을 선사한 것이다.
김윤섭 : 이번 작품들은 이미지 채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태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에서 더 나아가 작품들 자체가 텍스트가 되어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각 작품의 무의미성을 의미하나 그것이 어떤 위치에 어떻게 배치되고 접(그리고, 또한 ~와 등…)하냐에 따라서 다른 구조와 이야기, 이미지를 가진다. 예를들어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다.’ 와 같은 문장이 있다. 까마귀와 배, 나는것과 떨어지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구조이나 그것이 재구성 되었을 때 다른 무언가가 된다.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다. 각 단어들은 상이한 곳에 이접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 요즘 나는 ‘시적 그림그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림 자체 내에서도 이접이나 배치의 기능들이 가능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또 연결시켜 시를 쓰고 싶었다. 그것은 이미지 채집으로 이루어지고 디피가 되는 순간 문장이 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문자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미지의 시를 쓰고자 함이다. 이제까지 해온 텍스트들이 소설형식의 설명적 구조였다면 그것을 시적구조로 메타포로서 활용하는 것이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이다. 나는 그것들이 전시장에 구성되었을 때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가 되었으면 한다.
안유진 : 이번 ‘유혹의 기술’전을 준비하면서 이상하리만치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유혹’과 ‘기술’로 이루어진 저 단어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날카롭지만 느슨하게(혹은 나른하게) 느껴지는 이 테마를 나의 작업에서 어떻게 보여줄 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유혹’은 강렬하고 도발적인 힘이 느껴지며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정신적인 작용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유혹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서로간의 교감이 짧은 시간에 극을 달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