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6. 05 tue ~ 07. 20 fri
김영진 Youngjin Kim
이명미 Myungmi Lee
최병소 Byungso Choi
비우기, 그리기, 지우기
Emptying, Drawing, & Erasing
1.김영진, 이명미, 최병소의 작품
2018년 아트스페이스펄 특별기획전은 1970년대 이후 꾸준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세분의 작가를 초대해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미술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40~50년의 세월 속에서 세분의 작가는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감성의 결이 담긴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번 전시의 주제로 내세운 ‘비우기, 그리기, 지우기’는 창작의 태도와 과정에서 세분의 작가가 가진 제작방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김영진 이명미 최병소의 작업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화가인 아버지거나 엄마인 화가로 호흡한 숨소리였고 말의 벗이자 생각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는 깊이를 알지 못하는 푸른 바다의 표면이거나, 뒷마당에 핀 맨드라미의 검붉은 닭의 볏이기도 하고, 창공을 나는 새처럼 삶의 무게를 자유롭게 하는 하얗고 파란 빛으로 그만의 직관과 자의식이 발현된 흔적들이다. 그 흔적은 삶의 무게만큼 깊고 넓으며 풍부한 색과 형과 선으로 새겨져 있다. 그곳에 가닿는 ‘비우기 그리기 지우기’는 같지만 다른 체화된 손맛이 주는 묵직한 감촉이 담겨있다.
아트스페이스펄의 특별초대전인 ‘비우기 그리기 지우기’는 삶과 예술의 변곡점에서 취할 수 있는 개인적인 사유가 어떻게 미술로 녹아드는지,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이번 ‘3인의 전시’에는 신작과 구작을 함께 볼 수 있다. 김영진의 이번 전시작은 신체의 부분을 재료의 특성에 맞게 찍어 내 듯 오목한 형으로 공간을 비우는 음각 작품과 신체의 부분을 양각의 부조로 표현하고, 그 위에 푸른색을 뿌려 블루라이트로 빛을 발하는 작품도 전시한다. 이명미의 작품은 1992년의 작품인 ‘여인좌(左)상’으로 이번에 처음 전시되는 작품이다. 이명미의 작품은 작가특유의 위트가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선과 색, 색과 형 그리고 문자의 울림으로 언어의 의미가 결합하는 지점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시·지각의 장이다. 최병소의 구작과 신작은 신문지와 판화지라는 재료뿐 아니라, 설치작과 연필에서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도 볼 수 있다. 신문지의 활자를 지우고 긋는 행위에서 신문의 원지인 백지에 실크스크린 프린팅을 했다. 이 작품은 검은 색 실크스크린 사이 공간을 비우고, 비워둔 공간에 긋는 행위가 만들어 내는 2차원의 평면성은 3차원의 공간성으로 확장한 작품이 전시된다.
2.지우기 그리기 비우기
‘지우기 그리기 비우기’는 한 작가의 작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법적인 요소가 있지만, 세작가의 작품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번 전시 주제의 의미는 어쩌면 미술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동시에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만들어 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우기 그리기 비우기’는 미술의 기본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깊고 쉽게 혹은 풍부하면서 구체적으로 끌어내 그만의 행위를 통해 형과 색이 발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 의미는 하나인 다수 또는 다수인 하나의 삶과 예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몸과 정신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에 있다.
김영진작가의 작품은 종이나 캔버스가 아닌, 입체와 설치를 기본으로 한다. “내가 하는 작업 속에는 음(⍽)이 들어가 있다. 어떤 면에선 이 작업은 나의 마지막 블랙홀이고 또 마지막으로 인간이 가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의 작업의 기본은 음과 양에 관한 것이다.” 김영진은 확실히 음각을 시도하는 인물 조각이나 설치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왕성하게 작업하고 있는 경주 작업실을 찾았다. 100평 남짓해 보이는 창고형 작업실도 비좁을 만큼 이전 작품과 현재 진행 중인 작업들로 가득하다.
작업실의 바닥에 펼쳐진 해골이 빛을 발하고 있다. 금색 은색 녹색 그리고 빨갛고 파란 81개의 해골이 <색·시·날·빛>이라는 이름으로 조명을 품고 온 오프를 반복하며 빛을 뿜어내고 있다. 가로와 세로줄로 아홉 개씩(9×9) 설치된 해골이 천부경 81자를 떠올리게 한다. 작업실 곳곳에 자리한 작품의 존재감이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져 놓고 있다. 부처의 형상을 작가적인 시각에서 바라는 보는 것, 반가사유상 앞에 기대어 쉬고 있는 전신상은 사유하는 몸과 인간적인 몸을 결합해 놓았다.
작업실 벽에는 크고 작은 사진작업도 걸려있다. 자연을 배경으로 빛이 만드는 길게 늘어진 인체의 형상이 그림자처럼 서 있는 사진이다. 역시 음과 양을 강조한 사진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 인체를 비추는 빛은 긴 그림자를 만든다. 인체가 길게 왜곡되는 그림자를 포착한 사진이다. 이 역시 김영진의 시선이 가 닿는 곳, 대지의 숨결이 호흡하는 공간, 조각적 여백을 지향하는 작가적 시선이 담겨있다. 이번 아트스페이스펄에 전시할 작품은 작업실 벽면에 설치된 손이나 바닥에 놓인 팔 그리고 방석처럼 생긴 석고에 인체의 형상이 새겨져있는 작품이다. 신체의 부분이 방석에 닿아서 생기는 무게감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방석에 앉을 때 생기는 흔적, 부재를 통해 존재를 지각하는 방식, 음각이 전제된 작품이다.
김영진의 시선은 조각적 공간이거나 회화적 공간에서 실체와 실체 사이 혹은 실체를 전제한 그림자가 자리하는 곳, ‘사이-공간’에 가닿는다. 그리고 이 시선이 멈춘 곳에서 작가의 작업이 만들어 진다. 지난 부산비엔날레 전시되었던 사진과 선반에 놓여있던 석고 <1978-10-2>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했다. 선반에 놓였던 작은 입체물이 바로 ‘사이-공간’을 석고조각으로 만든 작품이다. 몸과 몸 사이에 생기는 공간을 석고로 채워 하나의 조각적 형태로 만든 작품, 그 형태는 몸의 부분들에서 생기는 공간, 움푹한 곳을 채웠던 흔적이다. 움푹 들어간 공간은 공기와 바람이 통하고 숨을 쉬는 공간이다. 김영진의 시선이 가닿는 곳, 바로 빈 공간을 보는 시선이다.
“나는 현대미술이 할 수 있는 실험성이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미 뒤샹이라는 작가가 실험을 다 했다. 나도 젊을 때 작업을 하면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의 실험성도 이미 있는 것을 내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만 ‘지금여기’라는 시간과 장소에서 존재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나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의 작업은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호기심은 진화를 끌어온 지남철 같은 혹은 무지개 같은 것, 꿈을 꾸는 것이다. 호기심은 악마의 필연이 뒤를 쫒아오는 것일 지라도…”(인터뷰)
김영진은 그간에 해 왔던 작업도 그렇지만 지금 하는 작업을 통해서도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어떤 재료실험과 장르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업은 자신의 창작태도를 투영한 그만의 창작물일 것이다. 예술에 대한 김영진의 태도는 다만 인식에만 머물지 않고 온몸으로 과감하게 실험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발견해 가려는 노력에 있다.
이명미작가의 전시작은 <여인左상>이다. 작품의 제목이 ‘여인坐상’이 아니고 ‘여인左상’이라는 부분은 작가의 위트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명미의 그리기는 선과 색 그리고 색의 면을 조율해 가는 과정에서 그만의 감각 작용, 보는 것에서 읽는 것을 겹쳐 놓아 의미의 확장을 시도한다. 그리기에 읽기가 결합된 언어적 의미는 선과 색에서 느끼는 시각적 강렬함에 위트와 유머를 담아 존재에 대한 무게와 깊이를 경쾌하게 풀어내는 것에 있다.
밝고 화려한 색채의 이면에는 작가의 회화적 역설이 담겨있다. 이러한 역설은 삶이 주는 내면세계의 고통, 그 허무한 심연의 슬픔과 부조리조차 밝고 강렬한 색으로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색의 면, 선의 윤곽, 선의 색 그리고 문자의 선, 윤곽이면서 색이기도 한 선들이 작가의 시선이 가 닿는 곳, 순색의 붓 터치로 화폭을 가득 채우는 색의 면, 그 울림은 절망적인 시간조차 삶의 환희로 바꾸어 놓는다. 색과 색이 포개지고 다시 그 사이를 선과 형 문자로 이어가는 화폭의 울림, 선과 색으로 넘치는 풍요, 그 속에 문자의 수사학이 자리한다.
60년대 신소설을 읽으며 청소년을 보낸 작가의 감성에는 앙티로망(반소설)이 강하게 인식되었다. 전통적인 형식이나 관습을 탈피하려는 부정의 정서가 싹튼 것은 당연한 시대적 감성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감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지만, 그 감성에 머물지 않는 작가가 바로 이명미다. 1968년 대학을 입학하고 70년대 작가활동을 하면서 고도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그리기’에 나선 사람, 바로 이명미스타일이다. ‘그리기’는 ‘기다리기’를 앞선다. 그래서 부조리조차 강렬한 색과 색 사이에 녹아들게 하는 이명미의 ‘그리기’는 채도가 높은 순색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순색위에 순색으로 만들어 가는 형과 색의 조화는 색을 통해 색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설이 자리한다. 이러한 역설에는 색의 파괴를 통한 자유로운 색의 구사라는 이명미의 ‘그리기’가 가진 연금술이 작동한다.
그리기에 더해진 ‘읽기’라는 수사학은 색의 부재를 형으로 또 형의 부재를 문자로 채우며 색과 형과 언어의 연쇄 속에서 부조리와 대립을 지운다. 선과 색으로 지운 다시 그리기는 그만의 조형언어로 <놀이>연작에 투영되어 있다. 예컨대 <놀이-모자그리기>는 핑크빛 배경에 붉은 색의 강한 터치 그리고 하얀색 선의 빠른 필치가 모자에서 연상되는 알파벳 H로 시작해 대문자와 소문자의 배열로 선과 색이 된다. 작가는 사물을 형상화하는 최소 단위만으로 형상 너머의 형상을 불러와 그것을 지우고 다시 그리는 이미지와 문자간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이러한 관계설정은 <동물 그리기>, <마셔버리자>, <말 탄 여자>로 이어진다. 2014년 작인 <아버지>는 색과 형이 문자에 포개지고 문자는 다시 일상의 이미지가 되어 문자를 지운다.
이처럼 이명미의 선과 색과 문자의 수사학은 그리기와 말하기,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을 놀이로 지운다. 다시 ‘그리기’라는 수행을 통해 고양된 순수한 색은 화폭에서 선과 색이라는 존재감을 획득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루는 이명미의 ‘그리기’는 일상의 경험을 강렬한 원색으로 칠하고 그리는 방식, 흘리거나 또 오려서 붙이기도 하는 다양한 기법으로 화면의 변화를 이끈다.
“나는 누구를 닮은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 나만의 색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나의 그림에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은 말 할 때와 침묵할 때처럼 일상의 리듬에 따른다. 나는 일관된 철학을 가지고 있기보다 그리기에 몰입 하다보면 나의 방식으로 그리게 된다. 내가 그림을 통해 확장을 시도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그림, 예상을 할 수 없는 지점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작업에서 언어가 등장하는 방식은 대중적인 내용도 있지만 추억이나 삶에 대한 암호이기도 하다. 나는 단순 명쾌한 시를 좋아 한다.” 이명미의 ‘그리기’가 단순 명쾌한 시가 되는 전시를 곧 보게 될 것 같다.
최병소작가의 신작은 신문지외 판화지(cotton paper)위에 연필로 상하의 방향으로 반복해 그은 선이 순차적으로 겹치며 검은색의 선이 되기도 하고, 선을 긋는 손의 힘과 연필심의 흔적이 부드러운 코튼지를 파고들 듯 겹쳐지는 곳에서는 시선과 빛의 방향에 따라 창백한 은빛선율이 된다. 그리고 신문이 인쇄되기 전의 백지에 실크스크린을 한 작품은 최근에 시도하는 신작으로 면과 면 사이, 면이면서 동시에 선이기도 한 공간을 통해 2차원의 평면성을 3차원의 공간성으로 확장해 놓는다. 이 확장된 공간은 기존의 연필로 반복된 긋기와 달리 면과 선 그리고 앞면과 뒷면의 관계를 열어 놓는 공간개념이다.
작가의 신문지 작업은 얇은 인쇄면에 무한 반복을 통한 선긋기, 그것은 2차원의 회화가 가진 착시(illusion)를 거부한 행위의 반복이다. 신문지는 작가에게 있어 삶과 예술, 현실과 미술을 잇는 ‘레디메이드 오브제’다. 이 신문지 오브제에 반복된 긋기와 지우기를 통한 행위과정은 신문지와 몸 그리고 정신이 하나가 되어 물아일체가 되는 그 과정에서 헤어지고 찢어진 구멍이 생긴다. 이처럼 재료와 행위의 반복 속에서 필연적으로 3차원의 공간이 생겨났다. 이 지점에서 찢겨져 구멍이 난 것은 작가의 행위의 소산에서 생긴 우연성의 공간개념이었다.
신문의 원지인 백지에 실크스크린을 한 작업은 2차원의 면과 면 사이를 마치 하나의 단선이나 면으로 남겨놓고, 그 남겨진 선이나 면을 3차원의 공간개념으로 인식하는 지점을 시도한다. 이 지점은 작가의 의도가 담긴 필연적인 공간개념이다. 우연적 공간개념이 창작의 과정을 통해 필연적인 공간개념으로 변화를 시도한 신작이 전시된다. 이러한 변화는 체화된 작업과정을 통해 자의식을 일깨우는 지점이다.
“신문지라는 <존재론적 조건>에서 출발한 나의 작업은 <바탕과 표면>, <지지체와 안료>라는 이원의 구조를 하나로 <일체화>시키는데 집중되었으며, 서로 흡수되고 침투하며 지우고 칠하며 부딪치고 격렬하게 접촉되어 찢어지고, 충격과 마찰의 물리적 과정에서 몸(행위)의 <살아있음>은 감각의 부활과 함께 <의식의 연금鍊金>으로 이행되고, 신문지는 <하나의 숭엄한 순수물질>로 화化하게 되어 완전히 변용되어 버린다.”(작가노트)
최병소의 실크스크린을 시도한 신작은 신문지를 연필로 긋거나 지우면서 생기는 구멍, 즉 헤지거나 찢어져서 생기는 공간개념의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만들어 가는 지점에 있다. 이 지점은 이탈리아 작가인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가 캔버스를 날카로운 칼로 잘라 놓거나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놓고 회화라는 2차원의 프레임에서 3차원인 조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공간개념으로 새롭게 정의했던 지점을 떠올리게 한다. 1950~60년대 폰타나는 회화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개념을 발견 했다. 폰타나의 발견은 착시를 위한 캔버스를 새로운 물성과 공간성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최병소의 작업은 애초에 캔버스라는 화구를 사용하지 않고 신문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틀을 버리고 출발했다. “비움과 채움, 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정신, 고통과 희열, 침묵과 절규, 삶과 죽음, 주체와 객체, 질서와 무질서, 의미와 무의미, 논리와 비논리 등 대립된 개념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열려진 생성>의 마당으로 나아가게 되며, 나는 재료 속에 스며들고, 스스로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됨으로서, 순수한 인식의 주체인 <분명한 세계의 눈>으로 남고 싶다.”는 작가의 말처럼, 연필로 선을 긋거나 지우는 반복 행위는 얇은 신문지가 검은 흑연이 된, 그것은 더 이상 신문이 아니라 새로운 물성, 몸과 행위가 수없이 침투해 겹쳐놓은 검은 심연, 우연과 필연이 겹치고 겹쳐 시공간을 품은 행위가 만든 흔적, 그것은 무심히 표면을 뚫고 아득한 지평 너머를 응시하는 것이다.
김옥렬(현대미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