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진 개인전, 바람의 색

장우진 개인전, 바람의 색

서울의 비 내리는 오후 (a Rainy Afternoon in Seoul), 2024, 피그먼트 프린트 및 석판화, 47.5x100cm

Woojin Chang Solo Show

Colors of Wind

장우진의 "노란 우산이 있는 풍경"

강미정(미학)

장우진은 꽤 오랫동안 도시의 풍경을 사진 매체를 통해 재현해왔다. 도심을 가득 메운 빌딩 숲은 서울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대도시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장면이다. 장우진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동시에 수평으로도 길게 펼쳐지는 도시의 얼굴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낸다. 얼핏 보면 지극히 평범한 건물 사진 같다.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기묘한 구석이 있다. 원경의 마천루부터 근경의 나지막한 건물까지 공간을 겹겹이 채우고 있는 이미지는 분명 사진인 게 틀림없는데, 어찌 보면 사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도시 풍경” 연작은, 도시에서 촬영한 건물들을 해체하고 재배치하여 마치 원래 그렇게 존재했던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해낸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근작인 “비 내리는 오후”는 홍콩, 서울, 볼티모어, 타이페이에서 촬영한 사진들로 구축된 도시 풍경이다.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마주 선 고층 빌딩들은 더러 다른 건물이나 애드벌룬을 유리 표면에 반사하기도 하는데, 장면의 디테일은 많은 부분 작가가 디지털 콜라주로 만들어낸 것이다.

타이베이의 비 내리는 오후 (a Rainy Afternoon in Taipei), 2024, 피그먼트 프린트 및 석판화, 47.5x100cm

이렇게 제작된 이미지라면 사진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재현’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적어도 사진적 재현은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심지어 허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장우진은 자신의 “도시 풍경” 연작을 허구적이라고 여기고, 2016년에 ‘리얼 픽션’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사진을 재료로 삼아 만든 허구이지만, 평범한 사진이 담지 못하는 도시의 진실을 전달해 주기에 더 실재적이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원본이 변형되고 심지어 조작되었다고 할지라도 “도시 풍경”은 어디까지나 사진이다. 물론 사진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겠으나, 사진을 지표(index)의 하나로 간주한다면 “도시 풍경”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찰스 퍼스에 따르면 지표란 어떤 실재하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킴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대상을 즉각 알아보게 하는 특수한 종류의 기호다. “도시 풍경”이 현존하는 또는 현존했던 사물을 카메라로 포착한 결과물이며, 관객이 이 작품에서 서울이나 타이페이의 거리를 바로 떠올린다면, 그것은 곧 사진인 것이다.

“도시 풍경”이 사진지표라는 것은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에 관한 것, 다시 말해 진실에 관한 것임을 의미한다. 장우진이 이 풍경 연작에서 말하고자 한 진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요, 정치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에서 작가는 인간의 얼굴이 아닌 도시의 얼굴을 소재로 삼고 있다. “도시 풍경”은 개별적 인간이 아닌 집단적 인간의 표상으로서 빌딩들의 집적을 다소 건조하면서도 스펙터클하게 재현한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들은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상징한다. 비록 화면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등장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건물 안에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이성과 욕망, 희망과 좌절 사이를 오가며 제 나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작가가 “도시 풍경” 연작과 나란히 진행하는 “인간 풍경” 연작은 무수한 인체 형상들로 구축한 기이한 풍경화들이다. “도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인간 풍경”에서는 오로지 사람들만 등장한다. “인간 풍경”은 멀리서는 자연 풍경처럼, 더러는 수묵 산수화처럼 보이지만, 다가가면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무더기임을 알아 볼 수 있다. 인간들이 모여 만든 파도, 산, 언덕은 마치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애초의 꿈과 목적을 잃어버린 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도시인들의 군상처럼 보인다.

홍콩의 비 내리는 오후 (a Rainy Afternoon in Hongkong), 2024, 피그먼트 프린트 및 석판화, 47.5x100cm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비 내리는 오후”는 기존의 “도시 풍경” 연작의 연속선 상에 있다. 이번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 대신 등장하는 것은 마천루의 수직적 상승의 힘을 상쇄하는 노란 우산의 수평적 지지력이다. 장우진은 노란 우산의 기다란 행렬을 화면 하단에 배치함으로써 도시 풍경의 전체 모습에 작지 않은 변화를 부여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이 노란 우산은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서 시위대들이 최루탄을 막기 위해 사용한 방어 도구였으며, 그 강렬한 이미지 덕분에 홍콩의 민주주의 세력의 아이콘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홍콩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우산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밝고 따뜻한 노란색이 전해주는 기운이 어린 학생들에게도 거대 권력체 중국 정부에 맞설 용기를 불어넣어줬을 것 같다. 초봄에 샛노랗게 피어 계절의 변화를 제일 먼저 알려주는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 기대, 달성이다.

색바람(colors of the wind)-1월, 2023, 실크스크린 판화, 36.5x65cm
색바람(colors of the wind)-3월, 2023, 실크스크린 판화, 36.5x65cm
색바람-5월, 2023, 실크스크린 판화, 36.5x65cm
색바람-7월, 2023, 실크스크린 판화, 36.5x65cm

세계 어느 곳이든 도시에서 삶을 짓는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기도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바라며 연대하고 함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들의 연대와 저항이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다고 할지라도 도시 공동체의 바람은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2023년 10월 우산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인 찬킨만교수가 방한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민주화 운동이) 겉으로 보기엔 쇠퇴한 것 같아도 사라지진 않았다. 이제는 일상적 저항운동으로 전환되어 거리가 아닌 카페와 일터에서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노란 우산의 염원은 쉽사리 사그라들 수 없다. 이는 비단 민주주의의 회복을 바라는 홍콩 시민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날로 커져 가는 빈부격차 속에서 분배의 정의를 바라는 서울 시민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비 내리는 오후”에서 노란 우산의 물결이 홍콩뿐만 아니라 서울, 볼티모어, 타이페이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게다.

비 내리는 오후 (a Rainy Afternoon), 2024, 디지털 콜라주, 98x444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