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제작된 이미지라면 사진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재현’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적어도 사진적 재현은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심지어 허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장우진은 자신의 “도시 풍경” 연작을 허구적이라고 여기고, 2016년에 ‘리얼 픽션’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사진을 재료로 삼아 만든 허구이지만, 평범한 사진이 담지 못하는 도시의 진실을 전달해 주기에 더 실재적이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원본이 변형되고 심지어 조작되었다고 할지라도 “도시 풍경”은 어디까지나 사진이다. 물론 사진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겠으나, 사진을 지표(index)의 하나로 간주한다면 “도시 풍경”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찰스 퍼스에 따르면 지표란 어떤 실재하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킴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대상을 즉각 알아보게 하는 특수한 종류의 기호다. “도시 풍경”이 현존하는 또는 현존했던 사물을 카메라로 포착한 결과물이며, 관객이 이 작품에서 서울이나 타이페이의 거리를 바로 떠올린다면, 그것은 곧 사진인 것이다.
“도시 풍경”이 사진지표라는 것은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에 관한 것, 다시 말해 진실에 관한 것임을 의미한다. 장우진이 이 풍경 연작에서 말하고자 한 진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요, 정치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에서 작가는 인간의 얼굴이 아닌 도시의 얼굴을 소재로 삼고 있다. “도시 풍경”은 개별적 인간이 아닌 집단적 인간의 표상으로서 빌딩들의 집적을 다소 건조하면서도 스펙터클하게 재현한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들은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상징한다. 비록 화면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등장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건물 안에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이성과 욕망, 희망과 좌절 사이를 오가며 제 나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작가가 “도시 풍경” 연작과 나란히 진행하는 “인간 풍경” 연작은 무수한 인체 형상들로 구축한 기이한 풍경화들이다. “도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인간 풍경”에서는 오로지 사람들만 등장한다. “인간 풍경”은 멀리서는 자연 풍경처럼, 더러는 수묵 산수화처럼 보이지만, 다가가면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무더기임을 알아 볼 수 있다. 인간들이 모여 만든 파도, 산, 언덕은 마치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애초의 꿈과 목적을 잃어버린 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도시인들의 군상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