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여백과 전면획화

빛의여백과 전면획화

모하 안종연 / 천수 노상동 2인전

빛의 여백과 전면획화

2023. 4. 19 - 4. 30

노상동의 먹빛과 안종연의 색빛

빛 속에는 환한 생명이 자라고 획 사이 여백에서는 저마다의 생명이 숨 쉬고 있다. 꽃과 나무가 파란 생명으로 푸르른 사월이다. 내일이면 비가 내려 곡식을 기름지게 하는 곡우다. 생명이 싹트는 계절에 우정을 나눈 예술동지 두 사람이 전시를 한다. 삶의 여정은 다르지만 색빛과 먹빛으로 예술적 교류를 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번 아트스페이스펄의 전시는 서로 다른 창작의 노정에서 만나 단단한 예술적 동지로 3~40년을 교류해온 안종연과 노상동의 2인전이다. 예술가의 창작과정은 희로애락의 삶 속에서 배우고 익혀 자신의 호흡을 불어 넣은 과정일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원석은 그만의 빛을 품은 작품으로 탄생한다. 아트스페이스펄의 노상동 안종연의 전시에는 저마다의 색과 멋을 품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노상동의 ‘획(劃)’

이번 전시에서 노상동의 먹빛은 붓글씨로 쌓아 온 ‘한일자’에서 붓을 지면에 닫지 않고 속도와 힘으로 그은 ‘획’이 전시되어 있다. 40여년을 ‘한일자’를 연구해 온 추상서예가인 노상동의 ‘획’은 마치 땅을 밟지 않고 걷거나 뛰거나 나는 것과 같은 신작이다. 이번전시에서 볼 수 있는 신작이 나오기까지 노상동은 “나의 한일자는 선이 되기도 하고 점이되기도 하면서 겉모습은 다르지만 본래는 하나다. 이러한 이치를 확대하면 시간과 공간 역시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석도(石濤,1642-1707)의 화론(畫論)을 읽고 영향을 받았던 노상동의 ‘획’은 ‘절대적인 하나와 상대적인 하나, 이 둘을 함유한 하나이며 둘의 경계에 있는 하나이다. 하나의 의미는 둘이면서 하나인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로서의 일획이다. 붓과 먹으로 이루어진 모든 현상도 일획에서 시작되지 않음이 없고 일획에서 마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없다. 노상동은 일획장을 쓴 석도의 글을 읽고 실험한 한일자 긋기로 40여년이란 긴 세월을 품었다. 그리고 그 품속에서 발아한 것이 추상획화다. 그것은 땅과 하늘을 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이고 하늘이 곧 땅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노상동의 ‘획’이다.

눈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눈(雪)이 땅에 닿는 그 접점의 순간을 추상서예가인 노상동의 눈(視)은 점, 선, 면이라는 고정관념을 벗고 선이 점이 되고 점이 면이 되는 땅, 즉 ‘네모’에서 ‘획’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것은 ‘사각의 면’에 깊은 호흡을 불어 넣은 필력으로 지면을 날아 그은 흔적, 바로 노상동의 획(劃)이 되는 순간이다. 이 흔적에 담긴 깊은 울림은 한일자로 40년을 살아오면서 체득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노상동의 ‘획’은 동토를 뚫고 발아하는 봄의 전령인 새싹처럼 강인한 생명의 호흡이 담긴 먹빛으로 노상동이 추구해온 수행성의 결과이자 새로운 시작인 ‘추상획화(劃畵)’의 탄생이다.

노상동_공(空)_46×75cm_한지에 먹_2022
노상동_산(山)_75×117cm_한지에 먹_2022
노상동_죽(竹) 난(蘭)_142×75cm_한지에 먹_2022

안종연의 색과 빛

안종연의 색과 빛의 평면과 공간설치는 색의 깊이감과 빛의 공간감을 담는 공간예술이다. 유리구슬이 품은 오묘한 색과 추상무늬에 인공의 빛을 더하면 시공간을 굴절시키듯 빛 그림자의 공간이 되고, 평면인 랜티큘러(Lenticular)를 활용한 작품은 원형의 정교한 색들이 공간적 깊이를 더한다면, 시야의 각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이미지는 환상적이다.

안종연의 작업적 효과는 렌티큘러 시트(sheet)의 수직 수평의 배열을 통해 평면회화가 추구해 온 착시의 역사를 새롭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오랜 세월 서양의 미술사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그리는 착시의 역사였다. 안종연이 만드는 공간의 착시는 물리적인 공간에 비물리적인 색과 빛을 담는 공간예술이다. 그것은 구슬에 빛을 담고 그 빛이 가 닿는 곳에서 생기는 빛의 그림자 혹은 랜티큘러에 정교한 원의 형과 색의 빛을 담은 판타지의 공간이다.

이처럼, 안종연의 작업적 비전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시각적 확장, 가장 기본적이면서 본질적인 색과 빛을 재료로 2차원에서 3차원 나아가 다차원의 공간을 감각하는 예술을 지향한다. 그것은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을 구체적인 공식이나 절차를 통해 표현하는 고도의 형식성과 정밀성을 요구하는 인지과학예술이다.

전시기획자이자 평론가인 김준기는 “안종연은 자신이 만든 유리 캐스팅 안에 LED 조명을 넣고 그것을 거울 앞에 펼쳐서 볼록이나 오목의 원형으로 확장한다. 안종연의 조명술은 빛의 에너지로 시각적 판타지를 생성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공간의 확장을 끌어내고 시간의 주름이라는 일관된 주제로까지 연결해내는 통섭의 예술을 잘 보여준다. 입체와 영상을 결합한 <만화경>은 에폭시 페인팅 연작에서 얻은 이미지들을 다양한 화면으로 변주한 켜켜이 확장하는 공간 속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만다라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고 썼다.

안종연_만화경 Kaleidoscope_lenticular, 120x100cm_2010
안종연_설치

이번 아트스페이스펄의 안종연 & 노상동 2인전은 물질을 통해 물질을 초월하는 두 가지의 재료적 기법과 의미뿐 아니라, 몸성과 정신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빛과 획을 통해 예술적 비전을 담았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온전히 빛을 발하지만 예술의 빛이 품고 있는 개별성과 보편성은 삶과 예술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안목성장이 이루어지는 장(field)이다. 이번 전시는 사십여 세월을 예술동지로 살아온 안종연의 ‘색빛’과 노상동의 ‘먹빛’ 속에서 안목성장이 가능한 시간이다. 긴 시간을 관통하는 작지만 큰 의미를 나누는 전시에서 문화예술의 정신적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다. (김옥렬/현대미술연구소대표,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