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자체가 모든 색의 혼합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려줌과 동시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과정에서 무의식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계획 없이 손 가는 데로 그린 잉크 드로잉 140점을 포토샵으로 붙여나가자 서서히 나타난 것은 무의식의 풍경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실험했듯이, 이전에 그린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어가며 만들어진 예측 불가능한 이미지는 보이는 확실한 것보다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A4의 1.5배 정도 크기의 종이에 1장 그리는데 이틀 정도로 그리는 촘촘한 작업이라 초현실주의처럼 ‘자동기술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종적인 결과가 예측되지 못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이전의 형상을 모르는 채 이어지는 형상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에서 시각적 무의식이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박소현이 전체에 대한 사유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편견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확대된 풍경 이미지는 작은 부분들을 드러내고 이 부분들의 변주는 끝없이 이어진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작가는 사진이나 드로잉을 픽셀의 형태로 보면서 하나의 색 대신에 생각지 못한 여러 색의 공존, 즉 ‘비슷한 색들은 있었으나 같은 색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놀라움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일상어에서 이미지가 ‘깨진다’는 표현을 쓰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편견이 깨짐을 본다. 박소현은 동일함과 비슷함의 대한 차이를 이전 작업 [비슷한 것들](2021)에서 실험 한 바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붓질을 세 가지 정도의 선으로 제한해서 화면을 채운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자주 쓰는 선들로 ‘정교하게 겹쳐진 선, 절취선 같은 단선, 휘갈긴 거친 선…’의 예를 든다. 이 세 가지 선들을 중첩시키며 채워진 화면들에 대해 작가는 ‘제한된 선들의 반복이기에 각 이미지는 얼핏 서로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 모두 다르다. 이미지의 구도, 연필의 진하기, 선의 굵기, 방향, 겹침 정도 등 모든 요소가 제각각이다’고 하면서 다름을 강조한다.